오랜만에 뻘글 써보기.
워킹데드 데릴X딕슨
...........이라고 쓰기엔 정말 아무 것도 없는, 15세 아니 5세 관람가.
[썅]
사람이 극에 달하면 욕이 나오나보다. 그 사람이 극에 달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극에 달했어도 말이다.
[썅, 좆같아. 씨발]
그러나 그 말꼬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. 욕이 가지는 위엄(?)이 반감된다.
그도 그럴 것이 지금 현관의 얄팍한 합판으로 된 나무 너머로 도대체 몇 명 아니 몇 마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워커들이 오늘 저녁의 성대한 만찬인 나, 아니 우리를 갈구하며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. 이 상황에서도 욕이 제대로 나온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일......
[니미 염병할 것들! 마더퍽커! 삼촌하고 홀레붙을 것들!!!]
정정해야겠다. 바로 옆에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석궁에 활을 장전하며 욕을 씨부렁거리고 있다.
[.....데릴]
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그래도 침착하게 가라앉는 걸 보니 이 옆의 금발 백인 마초 아저씨와 그동안 정이 들긴 들었나보다. 총알을 장전하며 남은 총알 갯수를 세어보며 그것이 몇 십 발도 되지 않는 데 절망하기보다,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이 집에 같이 있는 인간이 데릴 딕슨이라는 것에 글렌은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.
[왜, 차이니즈]
[코리안이라니까요]
[이 마당에 그게 뭐가 중요해, 씨발]
[그러네요. 하하]
모택동인지 누군지가 하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아야 좋은 고양이라고 했다. 워커가 보기엔 글렌이 차이니즈인지 코리언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. 싱싱한 피와 육즙이 흐르는 내장이라면 흑백황인 누구라도 그들에겐 똑같겠지. 미국은 드디어 사민평등을 이루었다. 할렐루야.
[......있을까요]
[뭐]
일행과 떨어져 식량이라도 있을까 들어온 이 외딴집은 사실 거대한 쥐덫이었다. 물론 워커들의 썩어버린 뇌가 함정을 파고 기다렸을 리는 없다. 그냥 단지.......다른 일행들이 어찌 되었는지 지금 상황으로선 알 수가 없지만..........데릴 딕슨과 글렌이 운이 없었을 뿐이다. 문 너머에서 이 집을 송두리채 무너뜨릴 기세로 몰려오는 워커들처럼 운이 없었던 것이다.
[우리, 살 수 있을까요]
[몰라]
데릴의 대답은 심플했다. 글렌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. 아니야 우린 살 수 있어. 희망을 버리지 말자. 일행이 우릴 찾으러 올 지도 몰라. 더 버텨보자.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도 데릴답다. 제기랄. 참 고마운 인간이다
[너 무기 뭐 가지고 있냐]
[이 피스톨하고, 장총........이 문이 얼마나 버틸까요, 데릴]
[바깥에 저 괴물들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]
글렌은 벽을 만져보았다. 다행스럽게도 나무 집이 아니라 튼튼한 콘크리트 철근으로 된 집이다. 이 집의 전주인은 현명한 사람이었다. 유리창문은 모두 단단한 나무로 못이 박혀있다. 그 틈새로 워커들이 보인다. 그러나 이 집에 살아남아있을만큼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. 아마도, 아니 분명히 아내일 여자와 손을 잡고 그는 머리에 총을 쏜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. 아직 거의 썩지 않은 걸 보니 자살한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. 그리고 그것은 불행하게도, 데릴과 딕슨의 이 위기로 이어졌다. 부부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흥건한 피의 냄새가 아무래도 지나가던 워커들의 구미를 당긴 것 같으니까.
[무기.....있을 지도 몰라요!]
[무기가 있으면 자살했을까]
[그냥 죽는 것 보단 낫죠]
글렌은 서둘러 바닥에 깔린 카펫을 넘겨보았다. 데릴도 바깥을 주시하다가 글렌과 함께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.
[병 주고 약준다더니]
[뭐?]
[아니에요. 한국 속담에 그런 말 있어요]
아무래도 이 집 주인의 자살의 원인은 빈약한 무기가 아닌 것 같다. 총기 마니아일까 아니면 단순한 인간 불신증이었을까. 부엌 카펫을 들추자 나타난 비밀 창고에는 각종 총과 탄환이 그득했다.
[씨발, 퍼킹지저스, 이 집 주인은 천사로군]
[일단 무기를 챙겨서 2층으로 올라가요]
[의왼데, 꼬마]
[.....네?]
한아름 총을 안고 주머니란 주머니에 탄환 상자를 쑤셔박고 있는 글렌을 보며 데릴이 씨익 웃는다.
[저 집주인 부부처럼 금방 포기할 줄 알았는데 말야]
[...........]
글렌은 야구모자를 고쳐 쓰고 데릴을 향해 퍽큐를 날렸다. 아직 삶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. 메기가 어딘가에서 분명히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. 릭도......캠프 일행도.......하지만 무엇보다도.
[다행이군]
데릴이 무기를 챙기며 중얼거렸다.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을 작은 목소리다.
[이 상황에 같이 있는 놈이 너라서 다행이야]
[........]
글렌은 구태여 데릴 지금 뭐라고 했어요, 혹은 나도 당신이라 다행이군요, 또는 좆같은 농담할 시간에 무기나 챙겨요, 란 말은 하지 않았다. 지금 이 상황에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. 눈빛과 눈빛만으로 인간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건 책이나 영화에서나 있는 꿈 같은 소리라고 생각했다. 생긴 것과 달리 글렌은 현실을 아는 인간이다. 그러나 지금 이 순간, 죽음이 바로 벽 너머 아니 얇은 합판 문 너머에 존재하는 이 순간에.
[마지막까지 싸우는 거다]
[물론이죠]
[....그 다음은, 그 때 가서 생각하자]
[그것도 당근이죠]
[좋아]
데릴은 씨익 웃고서는 글렌의 야구모자를 힘을 주어 몇 번 쓰다듬었다. 애 아니거든요, 나도 성인이거든요, 글렌은 볼멘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데릴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간다. 합판 문이 삐걱대기 시작했다. 이제 곧 워커가 아니 죽음이 문을 열고 밀려올 것이다. 그러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. 싸움을. 생을. 산다는 것을.
지금 이 순간 나는 인간이고 내 옆의 인간도..................인간이다. 그것만으로도 마지막까지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.
[......줘요]
글렌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.
[만약 정말로 최후의 순간이 온다면, 인간답게 죽여.....]
[닥쳐, 키드]
데릴은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.
[그딴 소린 정말 마지막에 가서나 하는 거다. 난 이보다 더 한 수라장도 몇 번 겪여봤어. 끝날 것 같지만 쉽게 안 끝나는 게 이 지랄맞은 인생이야. 그러니까 너도 이제 아가리 닥치고 장전이나 해]
[수다떠는 건 데릴이잖아요]
[한 마디도 안 지는 놈]
[하하하]
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웃을 수 있는 건 역시 옆에 있는 사람이 데릴이고, 글렌이기 때문일 것이다. 글렌은 알고 있었다. 데릴이 잘 웃지 않는다는 걸. 그리고 자신에게는 웃어준다는 걸. 저런 백인 마초 같은 남자에게 인정받는구나, 그런 자부심과 함께 가슴 속에 차오르는 따듯한 감정은.........아마도, 그래, 아마도 희망일 것이다.
글렌은 야구모자를 다시 고쳐쓰고 옷장으로 바리게이트를 친 2층의 한 방문을 노려본다. 이미 1층은 워커들로 가득 찼다. 발소리가 2층으로 올라오고 있다.
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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